4회 "돌봄과 장애 정의가 만나는 세계(2025 돌봄공론장: 전환과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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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5-08-18 21:37 조회 41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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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목요일, 2025 돌봄의 공론장 : 전환과 확장 4회차 발표(“돌봄과 장애 정의가 만나는 세계”)와 토론이 있었습니다. 후기를 올립니다
이 날은 사회건강연구소 김향수 연구위원의 사회로 [가장 느린 정의]를 번역하신 전혜은 선생님이 “장애 정의와 만난 돌봄세계”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해주셨는데요, ‘인식론적 충격’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의 제목처럼 “장애 정의와 만난 돌봄의 세계“가 기존 생각과 개념들의 부서짐과 함께 새롭게 펼쳐지는,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는 2시간의 발표였습니다. 전혜은 선생님은 장애 정의 관점에서 돌봄을 재편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런 재편이 왜 필요한지, 비장애중심적인 돌봄과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이러한 돌봄으로의 전환이 어떤 체계들과 맞서 싸우는 것인지, 우리 공동체 관계망 안에서 아프고 장애가 있고 다양한 정체성들이 교차하는 심신에 대한 돌봄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우리의 가진 무수한 ‘차이’가 돌봄의 걸림돌이 아니라 돌봄의 바탕이 되려면 필요한 사유와 실천들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기합니다.
이번 발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어는 기존의 장애 인권 운동, 장애인 권리 운동에서의 개념과 구분되어 사용된 ‘장애 정의’의 단어였습니다. ‘장애 정의’는 기존의 장애인의 권리, 장애인 인권운동이 법과 권리의 제도권 안에서 제1세계 시스젠더 백인 남성 중심으로, 중산층 이성애자 중심으로 전개되어왔음을 비판하며, 이러한 주류 장애 운동 조직에서조차 배제된 사람들, 가난하고 아프고 장애가 있는 흑인-선주민-유색인들, 퀴어이고 트랜스인 유색인 장애인들, 또한 교차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 미등록 이주민, 홈리스와 성노동자, 난민 등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고 불법적인 존재로서 낙인찍혀 뒤로 남겨진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함께 돌보고 살리며 연대하여 움직이고자 하는 ‘가장 느린 정의’를 주창합니다. 그 누구도, 아니 비인간의 존재조차도 뒤에 남겨두고 가지 않겠다는 결의로서의 ‘장애 정의’는 비장애주의적 사회가 구축해온 분리적이고 시혜적이고 폭력적인 돌봄 구조와 돌봄 규범을 부수는 급진적인 단어입니다.
능력 중심의 자본주의와 성차별주의, 인종 차별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 다양한 억압 체계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서로가 서로에게 명분과 동력을 공급하는 커넥션 구조를 이루고 있는 비장애중심주의를 폭로하기 위해 『가장 느린 정의(2024)』에서는 ‘장애 정의’의 10가지 원칙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비장애중심주의를 전복시키 위해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분법적 위계를 고정하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깨고 서로를 살리는 집단적 해방을 위한 공동 전선의 정치에 가담하고 헌신하며, 집단적 접근성을 구축하는 ‘불구의 정치”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핵심이 ‘돌봄’이라는 주장은 수동적이고 무능력한 의존자로 여겨왔던 돌봄수혜자 집단을 ‘비시민’이 아닌 돌봄의 주체로서 재기입하는 변혁적 작업의 출발점입니다.
공동체의 급진적 돌봄의 예시로서 인용된 『21세기 상호부조론』은 사회적으로 가장 주변부 위치에서 만들어지는 돌봄, 상호부조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사회적 보호와 돌봄으로부터 제외되면서도 오로지 단속의 대상으로서만 법안에 들어와 ‘추방된’ 형태로서 살아가게 하는 현실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와 가부장적 가족에 의해 감금과 폭력, 종속으로 프레이밍 되었던 돌봄의 오랜 역사와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형인 시설 중심의 돌봄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지 않고서는 돌봄이 장애 정의와 만나는 급진적 논의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전망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돌봄을 장애 중심으로 가져오는 변혁적 전환은 분명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게는 절박하고 필수적인 생존의 문제입니다. 비장애중심적 사회에서 장애 돌봄은 매우 개인적이고 부차적인 것, 언제든지 보류되거나 심지어는 삭제되어도 되는 하찮은 일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에 ‘플라스틱 빨대’와 같이 음료수를 마시는 순간과 같은 너무 작은 일에서도 생존을 걸고 협상하고 투쟁해야 하는 현실에서, 국가와 제도 밖으로 배제된 위치에서 공동체 돌봄에 의한 생존의 모색은 ‘운동’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사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돌봄이 진짜 사람을 살리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먹을 걸 구해오고 아픈 곳을 치료하며 부모를 잃은 친족 아이들을 보살피는 가장 기본적인 돌봄 행위가 가장 급진적인 행위가 되고 흑인 민권운동을 조직했던 블랙펜서당이 가난한 아이들에게 제공한 무료 아침 식사가 공권력의 일차적 제압 목표가 된 것은 이러한 돌봄이 저항의 힘을 결집시키는 출발점이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장애 정의운동에서도 다른 사회 정의 운동에서도 돌봄은 핵심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장에서, 우리의 공동체에서 돌봄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장애와 돌봄의 정의를 사회구조적으로 쟁취하는 거시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인종과 계급,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위계와 연동되어 가치절하되고 주변화된 돌봄노동의 현실에서 우리 곁의 미시적인 돌봄 일상에서 비장애중심적인 가치와 실천들을 전복시키고 이와는 다르게 함께 돌보고 연대하는 평등하고 급진적인 돌봄 실천으로 바꾸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대안으로 상상되는 공동체 돌봄 역시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불평등한 돌봄노동이 구조화되는 장이므로, 분명한 점은 돌봄은 논쟁적인 단어로서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단어라는 점입니다.
『가장 느린 정의(2024)』에서 장애 정의의 원칙 중의 하나로 제시된 “‘집단적 접근성’을 창조하는 실험”에 관한 제1장의 글은 “돌봄을 필요로 하지만 그걸 말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글”로 헌정되어 있습니다. ‘접근성’은 단순히 건물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으로 성취되거나 국가가 정해놓은 사회복지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선이 아닌 연대를 바탕으로 ‘불구가 만드는 접근성’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로리 에릭슨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활동보조인 제도로서만은 가능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집단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접근성을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일은 일회성의 배려가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존재할 수 있는 시공간을 함께 여는 일로서 멈추지 않는 부단한 과정이며, 차별적인 사회에서 그 누구도 뒤에 남겨두고 가지 않겠다는 연대와 결의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비장애중심의 가치체계를 갈아엎는 것처럼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랑’으로 명명됩니다.
전혜은 선생님은 아직은 장애와 돌봄에 관한 차별과 억압, 낙인과 고통의 정동이 뒤섞여 있는 현실에서 장애 정의가 돌봄과 만나는 세상에 관한 논의들, 그 가능성에 대해 함께 열어두고 고민하고 소통하며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 서로의 차이를 돌보고 살리는 방법을 평생 배우고 익히는 것이 고도의 장애 기술이자 지식의 과정이며 또한 장애 정의의 돌봄임을 강조하며 발표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이후 참석자들과 토론 시간에서 나누었던 소감과 질문, 논의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소감 1) 이번 회기가 온라인으로 진행되어 지방 거주자의 접근성 제약이 일부 해소되어 좋았다. 중요한 행사들이 서울에서 주로 개최되고 지역에서는 그런 기회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기 때문에 접근성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소감 2) 장애를 가진 당사자로서 발표 내용에 많이 공감했다. 대학원 재학 중인데, 대학과 학계 역시 비장애중심의 빠른 속도를 요구하고 있어 고충을 겪는다. 행사 참석을 하려면 휠체어 접근성이 필수적인데, 한 개인의 과도한 요구처럼 간주되는 상황도 자주 발생하고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도 미안함이나 수치심을 감각하는 경험을 일상으로 하게 되는데, 오늘 ‘장애 정의’라는 새로운 문법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였다.
질문 1) 저출생 담론과 인구소멸론, 국가멸망론으로 위기감을 느껴왔었는데, 이것이 너무 비장애중심적인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장애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장애 정의 운동이 성공을 한다면 저출생의 사회가 되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전혜은) 저출생 담론에서 요구하는 아이는 비장애인이면서 한국인 부부, 이성애규범적 가족제도 안에서만 생산되는 순혈의 아이를 뜻한다. 국가는 출생률을 올리기 위해 여성들에게 난임 시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왔지만 난임시술과 관련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는 비가시화되었다. 임신과 출산도 그 자체로 건강상의 위험을 초래하지만 모두 삭제된 채 그저 비장애인 아이를 생산과는 과정으로만 강조된다. 저출생 담론에서 생명이 소중하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여아 낙태가 행해졌고, 돈벌이를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해외로 보내졌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하는 레즈비언 커플이 많은데도 동성혼법제는 가로막혀있다. 무엇보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장애인의 임신과 출산은 사회적 비난을 받으며 장애아동은 태어나지 않게 하는 극단적인 비장애중심의 사회에서 저출생의 현실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기 어렵다.
질문 2) 장애 정의 운동이 국가 정책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당사자 공동체 혹은 당사자 중심의 운동으로 국가의 역할을 대신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국가 역할과 관련해서 장애 정의 운동은 어떤 요구를 갖는가?
전혜은)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는 위치에서 국가에게 어떻게 돌봄을 요구할 것인가는 중요한 쟁점이다. 특정한 복지제도를 확장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경찰들의 학대와 폭력에 맞서는 대정부 투쟁,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운동과의 연대, 정신장애인들을 시설에 감금하고 폭력을 휘둘러 왔던 역사에 대한 저항, 지역사회로의 삶을 요구 등 국가의 구조적인 불의함에 저항하고 정책이 장애인을 살리는 장애 정의에 부합하도록 요구하는 운동을 꾸준히 개진해왔다. 특히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고 생명을 박탈하는 마약 중독이나 팔레스타인 학살 등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것에 대해 규탄하고 대응책을 촉구하고 있다.
김향수) 현재 미국에서 흑인 청소년의 삶이 “스쿨 투 워크 트랜지션”이 아니라 “스쿨 투 프리즌 트랜지션” 즉 감옥으로 가게 되는 현실, 계속 배제되고 아프고 나쁘게 되는 구조적인 접근성의 문제들을 포함하여 구조적인 불평등에 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질문 3) ‘집단적 접근성’의 단어가 접근성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접근성이 편의시설 증진에 관한 법률로 보장되지 않음에도 손쉽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왔다. 돌봄의 네트워크 안에서 집단적으로 접근성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자기결정권도 개인에게 제공되는 일종의 소비자 선택권이 아니라 집단적인 공동체적인 돌봄 안에서 ‘불구 지성’의 방식으로 고려되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다.
전혜은) 예를 들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제반 조건들, 사회적 인정이나 지원, 인프라가 없어서 혼자 낳고 키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낙태는 나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마치 선택권인 것처럼 만드는 문제점을 우리가 지적하고 함께 깨뜨리는 것, 다시 말해 무엇을 결정하는가가 이분법적인 이지선다형으로 최악과 차악이 제시되고 선택 아닌 선택을 하게 만드는 이 좁은 틀을 깨는 작업이 자기결정권에 대한 사유 방식을 ‘집단적 접근성’으로 바꿔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위축증 장애인이어서 호흡하는 것, 먹는 것, 움직이는 것 모두 제한된 상황에서인 엘리스 웡이 말하는 자기결정권은 카페든 학교 도서관이든 대학원이든 내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합류할 수 있는 삶, 자유롭게 하고 싶고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다. 장애인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자기결정권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일상의 조건을 만드는 것은 특정한 개인의 호의거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중심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갈아엎는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질문4) 우리 사회에서 정해진 규정과 규칙으로 정의되지 않는 장애인을 자본주의가 점점 더 더 양산하고 있는 것 같다. 장애 정의나 장애인 인권 운동에서도 어떤 범주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분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전혜은) 오랫동안 계속 일하시면서 굉장히 아픈 곳이 많고 심지어 수술을 받고 하셔도 한 번도 자신을 장애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분들이 많다. 장애인이나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 힘이 빠져서 다시는 일을 못 할 것 같다며, 비장애 중심주의와 능력주의를 내면화한 상태로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살아간다. 목숨 걸고 국가 경계를 넘어온 미등록 이주자들이 막 목숨 걸고 일하다가 산재를 당하거나 아프게 되더라도 생계를 위해 다시 다른 일들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장애인으로 정체화하기는 불가능하다. 장애인이라는 정체성 정치에서 가시화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운동을 재편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중요해지고 반세계화 투쟁의 장에 장애 정치가 선봉에 서야한다는 지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아프고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정체하지도 못하고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있는 자리, 소속된 공동체에서 어떻게 비장애 중심성을 바꿔 나갈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같이 얘기하며 미시적인 일상을 바꿔 가는 느린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몸 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접근성에 대해서 어떤 얘기들을 할 수 있는지 또는 접근 불가능성에 대해서 어떤 기류들이 있는지에 좀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 시간이 그런 자리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 5) 돌봄 노동자들의 여건 향상을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돌봄노동을 하는 사람이 다수인데, 돌봄을 받는 사람의 입장과 요구들을 충분히 감안하는 것과 돌봄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것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을지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더 고민이 된다.
전혜은) 여성주의 돌봄 담론은 돌봄 노동자에 초점을 맞춰왔다. 여성들이 많은 돌봄 노동에 투여되어, 여성의 노동이라서 돌봄이 가치절하 되고 임금이 낮아지며, 다시 여성의 일이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은 간병 노동에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은 더 열악해지는데, 돌봄을 받는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어떻게 돌봄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적인 관계, 평등한 관계를 만들것인가는 페미니스트에게도 중대한 고민이다. 페미니스트 공동체에서는 이런 실험과 시도들이 가능했지만 다른 공동체까지 퍼져나갈 수 있을까의 질문은 남았다. 공동체가 급진화하는 돌봄을 한번에 함께 일궈내는 게 아니라 진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장애 정의 운동에서도 장애가 계속해서 일회적으로 소비되기도 했고, 백래쉬를 겪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이 불구의 유산, 불구의 조상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계보를 만들고 확산해내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질문 6) 사회학 전공자로서 외국인 보호소를 방문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국인 보호소는 미등록 이주자가 단속되어서 구금된 채로 추방될 때까지 갇혀 있는 공간이고, 면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장기 구금자로, 가난하고 늙고 몸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이주자인 동시에 범죄 경력이 있는 이주자들이다. 미등록 이주자는 범죄자가 아니고 행정법상의 위반 행위를 한 것이지만, ‘불법체류자’에 관한 주류 담론은 이들은 범죄자이며, 마약과 중범죄와 관련되어 위험스러운 자들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범죄와 같은 중범죄이거나 트라우마로 정신적 어려움을 심화된 장기 구금자를 면회할 때, 범죄자를 마주하고 있는 긴장감을 느끼게 되고 실제 불편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면서 나 자신 안의 도덕주의를 감각하게 되는데, 이 도덕주의를 어떻게 돌파하면서 돌봄을 말할 수 있을까?
전혜은) 『21세기 상호부조론』에서 공동체 안에서 성범죄 문제를 다루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유색인에 대한 경찰 폭력이 너무 심하다보니, 공동체 안에서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에 “경찰에 알리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피해자 치유에 힘쓴다”고 되어 있다. 흑인 남성의 성범죄 피해자가 흑인 여성인 경우가 많음에도 인종차별 문제로서 감금이나 경찰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백인 여성을 강간하는 포식자로서 잘못 재현되고 있는 흑인성에 주목하고 있을 뿐, 피해자 흑인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페미니스트들도 이 사법 정의에 개입하는 방식이 너무 백인 중산층 중심적이어서 유색인 여성들이 다시 배제되는 맥락이었고, 공동체 안의 해결 목표가 피해자에 대한 보호보다는 조직, 공동체 보위를 우선했던 것도 현실이다. “미등록 이주자는 행정법상의 위반 행위일 뿐 범죄자는 아니다



